국가R&D 망치는 대통령의 독단, 위법하고 졸속적인 연구비 구조 조정 철회하라!!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말은 위력적이었다. 31조에 달하는 국가R&D 사업은 주먹구구로 나눠먹고 갈라먹는 이권으로 곧바로 전락했다. 다음날 대통령은 차관 내정자들을 만나 한 마디 덧붙였다. "약탈적인 이권 카르텔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맞서 싸워달라." 그러자 언론은 정부가 마치 R&D 카르텔과 전쟁을 시작한 것처럼 다투어 보도했다.
바로 그날부터, 감사원 재정경제2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등 10개 연구관리 전문기관에 감사관들을 보내 실지감사(현장감사)를 시작했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를 통해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6월 29일 오후 과기정통부는 다음날(6/30) 오후 3시에 열기로 했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제4회 심의회의를 연기했다. 이 심의회의는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였다.
6월 30일부터 지난 주말 동안,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 출연연구기관들은 기획재정부로부터 기관(고유+일반) 사업비의 30%, 20%를 각각 삭감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관련 자료는 7월 2일 일요일까지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말과 기재부의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제인문사회계 26개 출연연구기관과 과학기술계 25개 출연연구기관은 30%, 20%씩 삭감한 예산 변경안을 졸속으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진단과 평가도 없었고,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현장 연구원들의 의사 또한 청취하지 않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연구 현장은 현재 혼란 그 자체다. 윤석열 정부의 사정 만능 통치가 급기야 국가R&D사업까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기술기본법 제12조의2(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의 배분․조정 등)에 따르면, 3) 과기정통부 장관은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의 배분 방향과 배분․조정 내역, 출연연구기관 예산의 배분·조정 내역 등을 마련하여 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매년 6월 30일까지 기재부 장관에게 알려야 한다. 법으로 명시해둔 이 절차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멈춰버렸다. 경제인문사회계 출연연구기관의 경우 기재부에서 예산 삭감을 주로 판단하는 1차 심의를 마친 후 신규 증액사업을 심의하는 2차 심의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30%를 삭감하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입만 열면 법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스스로 법을 어겼지만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재부는 법을 지키려고 하기는커녕 7월 4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나눠먹기식 관행을 혁파하고 31조원 규모의 R&D 예산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겠다고 공식화했다. 불과 1주일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른바 'R&D 카르텔'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시하지도 않고, 나눠먹기식 관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드러내지도 않고, 그것을 혁파하겠다는 정부와 관료들의 목소리만 크게 퍼져나간다. 대규모 R&D 절차․제도를 개선한다면서, 세계적 수준의 공동연구를 대폭 확대한다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진단이나 처방도 없이 병을 낫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치는 격이다.
우리 노동조합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국가R&D 혁신을 위한 방안을 정부에게 제안해 왔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에서도 과학기술 거버넌스를 대전환하고 R&D 기획관리 시스템을 혁신하라고, 출연연 위상․역할을 정립하고 창의적 연구환경을 위한 법․제도를 개선하라고 세부 계획을 제시하고 요구했다. 정부연구개발 의제 선정과 예산 배분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R&D 카르텔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정부 관료의 과도한 개입을 차단하고 출연연구기관 등 공공연구기관의 현장 연구원이 직접 참여해 연구개발의 의제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그러한 카르텔을 혁파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구체적 대안에 대해서는 귀를 막은 채 출연연구기관 연구비의 급격하고 일방적 삭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장 연구비 삭감에 급급한 정부가 어떻게 미래·원천 기술분야 투자에 집중하고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겠는가? 책임PM에 권한과 독립성을 부여한다면서 법적 절차를 거쳐 편성한 예산을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자율적인 연구환경을 확립하겠다고 공약했던 윤석열 정부의 본색을 비로소 보고 있는 듯하다.
주택, 경제, 조세, 노동, 산업, 환경, 보건 등 우리 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공, 공익분야를 연구하여 정부정책을 최일선에서 뒷받침하는 경제인문사회계 출연연구기관 고유 연구사업비의 삭감은 국가 전체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또 장기적인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과학기술계 출연연구기관의 연구비를 객관적인 진단과 분석 없이 삭감한 것은 연구개발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떨어뜨려 연구성과 창출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척박한 연구환경에서 어떻게 국민 생활 개선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중장기 기초연구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극단적으로 편중된 가치와 편협한 기준으로 나라 전체가 혼돈에 빠지고 있고, 정치와 철저히 분리하겠다고 했던 연구개발마저 극심한 혼란을 맞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R&D 흔들기는 궁극적으로 연구자들의 자긍심을 손상시키고 공공·공익 연구분야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총액인건비제, 공공기관 혁신가이드라인 같은 연구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와 지침으로 출연연구기관을 옥죄어 온 결과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현장을 떠났고, 남은 연구자들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 노동조합은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무당 사람잡듯 독단적으로 국가R&D사업을 뒤흔드는 것을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 연구현장 노동자의 힘과 지혜를 모으고 연구현장을 지키려는 모든 노동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국가R&D 혁신과 출연연구기관의 자율적이고 독립적 운영을 위해 윤석열 정부의 폭주에 강력히 맞서고 투쟁할 것이다. 2023. 7. 5.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